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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놀고~ 뭣이 궁금한 설명은 내가한다 왜지? 가문비나무 ㅋㅋㅋㅋㅋ여기! 공양왕 3년(1391) 신미년 유후~신난다디? 민자주방망이버섯 해결방법

by 7nq1za7h3pvu 2020.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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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

정월초하루 기축일.
왕이 신하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을미일.
우리 태조를 삼군도총제사(三軍都摠制使)로, 배극렴(裴克廉)을 중군총제사(中軍摠制使)로, 조준(趙浚)을 좌군총제사(左軍摠制使)로, 정도전(鄭道傳)을 우군총제사(右軍摠制使)로 각각 임명했습니다.
○ 보평청(報平廳)1)에서 제석도량(帝釋道場)2)을 열었다.
을사일.
국대비(國大妃)의 생일을 맞아 우인열(禹仁烈)·이인민(李仁敏)·정희계(鄭熙啓)·이숭인(李崇仁)·하륜(河崙)·권근(權近)·윤사덕(尹師德)·유염(柳琰)·이빈(李彬)·노윤(盧贇)3)·이행(李行)·원상(元庠) 등을 사면해 모두 개경과 지방에서 편의에 따라 거주하도록 허락했습니다.
병오일.
삼군총제부(三軍摠制府)에서 군대를 검열했습니다.
• 2월초하루 무오일.
회군 일등공신인 우리 태조에게 토지 1백 결을, 이등공신인 전 시중(侍中) 심덕부(沈德符) 등 17명에게 50결을, 삼등공신인 전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 최단(崔鄲)등 30명에게 30결을 각각 하사했습니다.
기미일.
왕이 남경(南京 : 지금의 서울특별시 및 경기도 양주군)을 출발했습니다.
신유일.
왕이 회암사(檜巖寺)4)에 유숙하면서 크게 불사를 열었는데 사치가 극에 달했습니다.
승려 1천여 명에게 음식을 대접하고[飯僧]5) 악공[伶官]을 시켜 향악(鄕樂)과 당악(唐樂)을 연주하게 하는 한편 왕이 손수 향로를 잡고 동서 승당(僧堂)을 돌면서 승려들에게 음식을 권하니, 순비(順妃 : 공양왕비인 盧氏)도 그 뒤를 따랐다.
또 왕이 왕비 및 세자와 함께 밤이 새도록 예불을 올렸다.
임술일.
왕과 세자가 손수 승려들에게 베 1,200필을 보시하고, 강(講)을 주관한 승려[講主僧]에게는 단견(段絹) 각 세 필과 옷 한 벌을 하사했습니다.
이어 왕이 절 문에서 생일축하를 받았습니다.
정묘일.
왕이 남경(南京)으로부터 돌아오자 개경 도성 사람들이 채붕(彩棚)을 만들어두고 영접했습니다.
신미일.
삼군총제부(三軍摠制府)의 지휘 아래 있는 병력을 사열한 후 조를 나누어 숙위(宿衛)하게 했습니다.
을해일.
국대비(國大妃)가 남경으로부터 도착했습니다.
정축일.
전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원굉(李元紘)6)의 딸을 세자비로 임명했습니다.
경진일.
백관들이 세자비를 맞은 데 대해 하례하는 글을 올렸다.
○ 이 날 다시 심덕부(沈德符)를 청성군충의백(靑城郡忠義伯)으로, 이원굉(李元紘)을 경원군(慶源君)으로, 안경량(安景良)7)을 양광도 도관찰사(都觀察使)로, 이원집(李元緝)을 사헌지평(司憲持平)으로 각각 임명했습니다.
신사일.
세자로 하여금 양릉(陽陵 : 신종릉)을 참배하게 한 후, 이어 효신전(孝愼殿)에서 환도(還都)를 고하는 제사를 지내게 했습니다.
계미일.
정읍현(井邑縣 : 지금의 전라북도 정읍시)사람인 중랑장(中郞將) 왕익부(王益富)가 스스로 충선왕(忠宣王)의 서증손(庶曾孫)이라 떠들고 다니므로 그를 교수형에 처했으며 아울러 자손 13명에게도 화가 미쳤다.
• 3월초하루 무자일.
일식이 있었습니다.
○ 헌부(憲府)에서 지용기(池湧奇)가 왕익부(王益富)와 내통했습니다며 처형할 것을 요청하는 소를 올리자 지용기(池湧奇)를 곤장 1백 대를 때리는 장형에 처한 후 먼 지방으로 유배8)보내고 그 가산을 적몰했습니다.
경인일.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에서 순비(順妃)와 세자를 책봉하는 예식을 거행할 것을 요청하니 왕이 허락했습니다.
갑오일.
간관(諫官) 진의귀(陳義貴)·정습인(鄭習仁)·이황(李滉)·권담(權湛)·우홍부(禹洪富)9) ·송우(宋愚)·맹사성(孟思誠)10)·윤규(尹珪)·윤수(尹須)11)를 외지로 유배12)보냈습니다.
무술일.
풍저창(豊儲倉)과 광흥창(廣興倉)을 서강(西江)에 짓고, 조운해 온 미곡을 저장했습니다.
임인일.
홍복도감(弘福都監)으로 하여금 베 2천 필을 연복사(演福寺)에 헌납해 탑을 짓는 비용으로 쓰게 했습니다.
갑진일.
겸 전의시승(典醫寺丞) 방사량(房士良)13)이 당면한 문제 11개 조항에 대한 건의문을 올렸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갔다.
“『서경(書經)』에는 ‘삼가 검소한 미덕을 지켜 먼 미래를 구상하라.
14)’고 했으며, 옛날 한나라 문제(文帝)는 노대(露臺)15)를 지을 백금을 아껴서 4백 년 한나라 왕업의 터전을 굳건히 했습니다.
그러나 원나라 황제들은 그 말기에 만수궁(萬壽宮)에서 연락(宴樂)을 즐기다가 1백 년 뿌리내린 왕업을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이렇듯 나라의 흥망과 길흉이 모두 부지런한가, 나태한가, 검소한가, 사치한가에 따라 판가름나니 이것이야 말로 참으로 두려워해야 할 일입니다.
검소함을 숭상하고 부화(浮華)함을 배척하며, 게으름 없이 더욱 부지런하소서.
”“기인(其人)16)제도는 역사적으로 아무 근거가 없는 것으로 충렬왕 당시 5도(道)의 주군(州郡)에서 3백 명을 차출해 판도사(版圖司)와 조성도감(造成都監)에 각 150명씩 나누어 소속시킴으로써 정원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경인년(庚寅 : 충정왕 2년, 1350)년의 왜적17)의 침구 이래로 주군이 완전히 황폐해지자 어떤 고을에서는 남아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그 자리가 오래 비게 되었고 관아에서는 정원을 채우느라 그들을 뒤쫓아 체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자 개경에 있는 기인들의 주가(主家)에서는 체포되어 수감된 자들 외에 사람을 고용해 대신 자리를 채우면서 그 삯으로 하루에 베 1필 씩을 물고 있습니다.
시간이 흘러 그조차 지탱할 수 없게 되면 어떤 집은 파산하거나 또 어떤 집은 아예 문을 닫고서 그 고통을 면하려 하는 형편입니다.
또 관에서는 위세를 내세워 해당고을 출신 사람들을 못살게 굴고 협박해 그 노비를 빼앗아다가 교대로 그 자리를 메우게 합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아무리 번성하는 고을이라도 기인을 맡게 되는 향리들은 장차 먹고 살 일을 아예 염두에도 두지 못한 채 가지고 있는 재산을 다 팔아 싸들고 기인으로 근무하게 되니 그 폐단이 말할 수 없이 큽니다.
부디 전하께서는 과거의 악습을 따르지 마시고 그 폐단을 깡그리 없애도록 하소서.
”“공훈의 기백은 사직을 영원토록 떠받드는 주석(柱石)과 같으며 충의의 기풍은 난신적자를 영원토록 꺾어버릴 부월(鈇鉞)과도 같습니다.
왕실에 공훈을 세우고 나라에 충의를 바쳤으나 불행히도 처형당해 목숨을 버렸던 안우(安祐)·이방실(李芳實)·김득배(金得培)·박상충(朴尙衷) 등의 사람들에게 포상을 덧붙여주고 특별히 소뢰(小牢)18)의 제향을 내리시어 그 곧은 넋을 위로하소서.
”왕이 그 건의에 깊이 동감하고 허락했습니다.
위 세 가지 외 나머지 건의는 해당되는 지(志)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 우리 태조가 병으로 사직을 청하는 글을 올린 후 평주(平州 : 지금의 황해북도 평산군)의 온천으로 갔는데 그 전문(箋文)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제가 용렬한 몸인데도 불구하고 전하의 각별한 은총을 입어 장상(將相)의 높은 지위에 올랐는데도 전하께 오히려 조그마한 보탬도 되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스스로 사직하여 어진 이를 등용할 길을 열어 드림으로써 전하로 하여금 훌륭한 덕치를 펴실 기회를 만들어 드리는 것이 도리라 여긴 나머지 미흡하나마 정성을 다해 사직(辭職)의 건의를 올렸으나 그때마다 윤허를 얻지 못해 더욱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저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나라의 규모가 다르고 예와 지금의 일이 다르다 할지라도 임금과 신하가 적합하게 서로 만나기가 어려운 것은 다름이 없습니다고 여겨집니다.
한나라 고조(高祖)는 창업의 군주로서 사람을 보는 눈이 있어 유능한 자를 등용했으나 결국 공신을 대우하는 일에는 실패하니 식자들이 그러한 것을 결점으로 여겨 애석해 했습니다.
반면 광무제(光武帝)는 중흥의 군주로서 호걸들을 두루 등용해 한나라 황실을 다시 바로잡는 한편 공신을 잘 대우해 끝까지 보호해 줌으로써 후세 사람들로부터 훌륭한 제왕이라는 칭송을 받았습니다.
한 고조의 공신이었던 한신(韓信)과 주발(周勃)의 비참한 최후에 비하면 몸을 숨겨 자신을 보존한 장량(張良)이 휠씬 나았고 광무제의 공신이었던 구순(寇恂)19)과 등우(鄧禹)20)도 오히려 은둔을 선택했던 자릉(子陵)21)의 고상한 뜻에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제가 비록 배운 것은 없으나 장량과 자릉을 본받고자 하오니 부디 전하께서는 광무제처럼 제가 숨어 살고자 하는 뜻을 허락해 주소서.
병신년(공민왕 5 ; 1356) 6월에 저는 선고(先考) 이 아무개22)의 뒤를 따라 현릉(玄陵 : 공민왕)의 분부를 받자와 쌍성총관부(雙城總管府)를 평정해 옛 영토를 수복23)했습니다.
그리고 남은 힘을 가지고 영토를 더욱 확장시켜 청주(靑州)까지를 번진(藩鎭)으로 삼음으로써 동쪽 변경지역의 방위에 대한 우려를 불식시켰습니다.
현릉께서 그 공을 가상히 여기시어 저의 선고에게 영록대부(榮祿大夫)·장작감사(將作監事)벼슬을 주시면서 삭방도만호(朔方道萬戶)로 임명하시고 또한 연공에 관계없이 저를 특별히 발탁해주시니 제 나이 아직 서른도 못되어 재상의 지위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도와드리는 바가 없는지라 아침저녁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했습니다.
무진년(우왕 14 ; 1388)에 이르러 가짜 성붙이인 신우(辛禑)가 군대를 동원해 중국을 침범하려 했으나 아무도 감히 반대하지 못하는 바람에 나라가 거의 패망할 뻔 했습니다.
이에 제가 앞장서 대의를 부르짖고 회군해 종묘사직을 바로 잡았으나, 이를 두고 어떤 자들은 군대를 제멋대로 움직였다고 헐뜯었습니다.
그 후 기사년(창왕 원년 ; 1389) 11월에 교지(敎旨)를 받들어 가짜 왕을 멸망시키고 왕씨를 부흥시킴으로써 종묘의 제사를 올바르게 했으나 이를 두고 어떤 자들은 제가 정권을 잡았습니다고 말했습니다.
또 현재 제군사(諸軍事)가 되어 군대를 양성하고 방어태세를 갖추며 간웅(奸雄)을 굴복시키고 은밀히 왜적의 침구를 막았지만, 이를 두고 또한 군자(軍資)를 소모합니다고 헐뜯는 등, 온갖 험담을 다하니 무어라 밝히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현재 저에게는 세 가지 불행한 일이 있으니, 공적은 미미한데도 너무 큰 상을 받는 바람에 사람들로부터 시기를 받게 된 것이 그 첫 번째 불행입니다.
사직을 보존하고 정통(正統)을 회복해 도적을 평정함으로써 겨우 티끌만한[涓埃]24) 도움을 드리긴 했으나 이것 때문에 높은 지위에 오른 것이 두 번째 불행입니다.
예로부터 공로를 가지고 허물을 덮어버릴 수 없는 법인데도 저 자신이 미혹에 사로잡혀 용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세 번째 불행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생각하면 진실로 황공하기 짝이 없습니다.
소공(召公)은 ‘저는 총애와 복록을 받았습니다하여 공로를 세웠다고 뽐내지 않겠습니다.
’고 하였고25), 채택(蔡澤)26)은 ‘네 계절이 순서에 따라 바뀌듯 공을 이룬 자는 물러가야 합니다.
’라고 말했으니 이것이야말로 자연의 이치입니다.
저 또한 어진 이를 등용하는 길을 막아서는 안 되니, 시골로 돌아가서 여생을 보존하는 것이 저의 간절한 소원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후한 광무제 못지않게 공신을 보호했습니다는 명성을 듣게 되신다면 저로서는 참으로 큰 다행이겠습니다.
”병오일.
좌대언(左代言) 이첨(李詹)을 평주(平州)에 보내 궁온(宮醞)27)을 하사하고 위로하게 하면서 다음과 같은 비답(批答)을 내렸다.
“대신(大臣)의 한 몸은 국가의 흥망과 백성의 희비(喜悲)에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직임이 이처럼 중요한 만큼 그 진퇴를 가볍게 결정지을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소공(召公)이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려 하자 주공(周公)은 신하의 충의를 들어 그를 설득했던 것입니다.
경은 산천의 걸출한 정기[間氣]28)를 타고난, 사직(社稷)의 으뜸가는 신하로 일신의 편안을 돌보지 않고 나라 일에 진력하니 그 충성은 해보다도 더 빛나며 신의를 굳게 지키니 그 공적은 왕실을 넉넉히 떠받쳤다.
선왕이 다스리던 때부터 과인이 이 왕위에 있는 이 날까지 경은 있는 힘을 다해 우리나라를 태평하게 만들었다.
무진년(1388)에는 중국을 침범하러 동원된 군대를 회군시켰고 기사년(1389)에는 가짜 왕을 몰아내고 왕씨를 부흥시켰으니 이로써 국운이 다시 이어졌고 민생이 다시 소생했습니다.
또 군사를 조련함으로써 왕실을 수호하는 것은 그 모두가 하늘의 이치에 합당한 일이니 딴 사람이 헐뜯는 말을 두고 무엇을 근심할 필요가 있으랴? 높은 지위에 오른 것을 두렵게 여기는 것은 바로 경이 늘 지켜온 바이니, 나로서 국정을 의논하고 같이 나라를 다스릴 사람은 경 외에 누가 있겠는가? 후한의 광무제가 일을 맡기지 않았기에 자릉은 고상하게 한거할 수 있었고 한나라가 안정을 이루었기에 장량[留侯]은 벼슬을 떠나 은둔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와 지금은 그 형편이 판이하니 경은 다시 직위에 올라 나의 마음에 부응하라.
”을묘일.
우리 태조를 다시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박자문(朴子文)을 좌사의(左司議)로, 심효생(沈孝生)29)을 문하사인(門下舍人)으로, 조휴(趙休)30)를 좌헌납(左獻納)으로, 유기(柳沂)31)를 좌정언(左正言)으로 각각 임명했습니다.
정사일.
이조좌랑(吏曹左郞) 우홍명(禹洪命)32)을 평주(平州)로 보내 우리 태조에게 궁온(宮醞)을 하사했습니다.
• 여름 4월임술일.
가뭄이 계속되자 금주령을 내렸다.
갑자일.
혜성(彗星)33)이 열흘 넘게 나타났다.
을축일.
우대언(右代言) 유정현(柳廷顯)이 연복사(演福寺) 수축공사를 중지하라고 건의했으나 왕이 듣지 않았습니다.
기사일.
가뭄이 계속되자 죄질이 경미한 죄수를 석방했습니다.
경오일.
큰비가 내렸다.
○ 문하평리(門下評理) 김주(金湊)에게 대사헌(大司憲)을 겸직시키는 한편, 허응(許應)34)과 전오륜(全五倫)35)을 좌·우상시(左右常侍)로, 전백영(全伯英)을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 권진(權軫)36)을 우헌납(右獻納)으로, 김여지(金汝知)를 좌정언(左正言)으로 각각 임명했습니다.
병자일.
왕이 평복차림으로 몰래 대궐을 나와 마암(馬巖 : 지금의 개성직할시 부암동)에서 활쏘기를 구경했습니다.
이에 지신사(知申事) 성석용(成石瑢)이 왕에게 호위와 의장을 갖출 것을 건의하지 않았습니다는 이유로 헌사(憲司)에서 그를 탄핵하자 노한 왕이 곧장 성석용(成石瑢)에게 계속 일을 보도록 명령했습니다.
또한 집의(執義) 강회중(姜淮仲)과 지평(持平) 이감(李敢)을 좌천시키는 한편, 우홍득(禹洪得)을 집의(執義), 이작(李作)37)을 지평(持平)으로 각각 임명했습니다.
기묘일.
명나라 황제의 이름과 같은 글자를 피하기 위해[避諱]38) 원(元)자를 쓰지못하게 하고 대신 원(原)자를 쓰게 했습니다.
임오일.
명나라 황제가 과거 원나라에서 중정원사(中政院使)를 지냈던 환관 한용(韓龍)과 황독만(黃禿蠻) 등을 보냈는데 그 편에 부쳐온 예부의 공문[咨文]은 이러했습니다.
“다음과 같은 황제의 분부를 전합니다.
‘짐(朕)이 옛 전적을 상고해 보니 삼한(三韓)의 땅은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말이 생산되는 곳이라고 합니다.
현재 변방 방어에 쓸 말이 부족하기에 삼한 출신의 환관[閹人]을 보내 권서국사(權署國事) 왕요(王瑤 : 공양왕) 및 그 신하들에게 지시합니다.
관직에 있는 자와 부잣집들을 잘 설득해 말 1만 필을 사들인 다음, 각 관원 및 부잣집 자제들로 하여금 요동(遼東)으로 말을 몰고 와서 교할(交割)39)한 후 대금은 우리 수도로 와서 받아 가도록 하라.
또한 각 관아에 환관 2백 명이 필요합니다.
삼한(三韓)은 멀리 동쪽 바다 저쪽에 위치해 우리에게 토산물을 바치지도 않고 우리가 그쪽 사람을 부릴 수도 없으니 비록 우리의 지시에 따라 신하라고 칭하기는 하나 무엇으로 믿겠는가? 나라가 부유하고 인구가 많으니 위와 같은 우리의 요구가[需索]40) 크게 부담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계미일.
왕이 정치에 대한 간언을 구하는 교서를 내렸다.
“천재지변을 그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덕을 닦는 일이며, 정치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간언을 구하는 일입니다.
옛날 송경(宋景)41)의 착한 말 한마디가 형혹성(熒惑星)42)을 3도[三舍]나 물러가게 했으니, 하늘과 사람 사이의 감응은 이처럼 빠른 법입니다.
내가 하찮은 몸으로 조종(祖宗)신령의 은혜를 받아 신민(臣民)의 위에 있게 된 후 하루도 쉴 틈 없이 걱정하고 노력해 태평성대를 이룩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지혜가 미치지 못하고정치 및 교화에 잘 적용하지 못하니 큰 냇물을 건너는데 어떻게 건너가야 학문이 밝지 않아 매양 할지를 모르는 것과 같다.
최근에 일관(日官)이, 천문[乾文]43)이 경고를 보내느라 객성(客星)44)이 자미원(紫微垣)45)에서 폭발했고[孛]46), 화요(火曜(火星))가 여귀성좌(輿鬼星座)47)로 들어가는 등 심상찮은 재변이 발생하고 있습니다는 보고를 올리니 두려운 마음이 더욱 커진다.
부족한 덕망을 더욱 수련하지 않아 명나라 황제께서 미덥지 못하게 여기신 때문인가? 정치에 부족한 점이 있어서 백성들의 여망에 부응하지 못했기 때문인가? 신상필벌(信賞必罰)의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기 때문인가? 관직에 등용되어 일을 맡은 자가 사리(私利)를 좇아 일을 처리했기 때문인가? 아랫사람의 사정이 위로 다 알려지지 못해 그 원통함이 미처 다 퍼지지 않았기 때문인가? 백성들이 받는 폐해가 아직 다 없어지지 않아 재물이 쓸데없이 낭비되고 있기 때문인가? 비상한 재능을 지녔으면서도 아직 천거를 받지 못한 자가 누구인가?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 가운데 아직 쫓겨나지 않은 자는 누구인가?이 같은 폐단을 나 한 사람이 어찌 다 살펴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직언하는 언로를 활짝 열어 임금의 눈과 귀를 가리는 악습을 일소하고자 합니다.
하찮은 목동이나 나무꾼의 말이라도 들을 만한 것이 있는 법이거늘 하물며 하늘의 명에 따라 임금과 함께 나라를 다스리고 하늘이 내리는 봉록을 받는 경대부(卿大夫)나 기타 여러 신하들의 말이야 어떻겠는가? 이에 정치와 교화를 함께 일신함으로써 천심에 보답코자 하노라.
아아! 신상필벌의 원칙이 분명해야 예악이 흥기하고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야 풍우(風雨)가 때를 맞추어 내리는 법이며, 관리가 적절히 임용되어야 백성이 즐겁게 살 수 있나니 그 요체가 어디에 있는가? 알고도 말하지 않는 사람을 두고 어진 신하라 부를 수 없으며 아는 것을 죄다 말하지 않는 사람을 두고 곧은 신하라 부를 수 없습니다.
그대들 각급 신료들은 모두 밀봉한 글을 올려 과인의 허물과 현 정치의 잘잘못과 백성들의 이해(利害)를 숨김없이 알리도록 하라.
건의가 받아들일 만하면 내가 상을 내릴 터이며, 비록 그 건의가 정확하지 않더라도 죄를 주지 않을 것입니다.
”갑신일.
왕이 북천궁(北泉宮)에서 한용(韓龍) 등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 5월무자일.
형조판서(刑曹判書) 조면(趙勉)48) 등을 불러 이렇게 지시했습니다.
“지금 천문에 변괴가 자주 발

반가워요:-]먀리뀨 이에용.오늘도 이렇게 저희 BLOG를 놀러와주셔서 감사합니다.^^날씨가 화창한게 매우 기분좋아요.이웃님들은 오늘 어떤일 하면서 보내셧나요? !바로 다뤄볼 토픽은이랍니다.마음의 준비 되었으면 지금이순간 달려나갑니다. 가봅시다 :-]

그나저나 저두요 #민자주방망이버섯 # # 에 대해서 은근슬쩍 궁금했어요.애청자분들 서칭에 저도 즐거운 마음으로 검색중이랍니다.그러믄 진짜로 시작해 볼까요?구독자분들의 성원에 힘입어서이제 시작해요~

다양한분들이 요청하시는게 바로 민자주방망이버섯이에요.자주 생각하는거지만 블로그 하면서 진짜 많은 생각을 배워서 좋아요잇님들은 생각은 어떠셔요?최근, 이슈가 엄청 올라가는 관심사 중에서다양한분들이 문의하시는게 당연하게도 민자주방망이버섯이지요.응?이라고 느끼실 수있을수있지만 자주들 문의하시는 내용이에요기분좋은 햇살을 감싸안으며 웹서핑을 감상할 수 있는 행복한시간 잇님들의 없도록 열심히할게요.매번이지 느끼지만 달콤한 밥을 적당히 먹고 적당한 온도에서 포스팅 쓰는것이 정말이지 행복이랑께요여기 마리크 포스팅에서 하이 퀄리티의 포스팅 보고가세요.

북한명은 보라빛무리버섯입니다.
가을에 잡목림, 대나무 숲, 풀밭에 무리를 지어 자라며 균륜을 만듭니다.
버섯갓은 지름 6~10cm로 처음에 둥근 산 모양입니다가 나중에 편평해지며 가장자리가 안쪽으로 감긴다.
버섯갓 표면은 처음에 자주색입니다가 나중에 색이 바래 탁한 노란색 또는 갈색으로 변합니다.
살은 빽빽하며 연한 자주색입니다.
주름살은 홈파진주름살 또는 내린주름살로 촘촘하고 자주색입니다.
버섯대는 굵기 0.
5~1cm, 길이 4~8cm로 뿌리부근이 불룩하고 섬유질이며 속이 차 있습니다.
홀씨는 5~7×3~4㎛로 타원형이고 작은 사마귀 점이 덮고 있습니다.
홀씨 무늬는 연한 살색입니다.
 식용할 수 있습니다.
한국(속리산, 덕유산, 한라산), 북한(백두산) 등 북반구 일대, 오스트레일리아 등에 분포합니다.

yle="text-align: center;"> 이번 주제는 민자주방망이버섯 에 관련하여 알아보았는데요.도움이 좀 되셨나요?그럼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시구요.여기까지 마리끄 올립니다.우리 또봐요!바이~